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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호수에 주름이 생기는 이유

한 줄 나이를 먹으며 / 나무도 키가 크고 / 너도 깊어지곤 했지 /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 흩어진 물방울을 모으려 하면 / 쏟아지는 비가 되어 돌아오곤 했지 / 흠뻑 젖은 호수 위로 / 겹겹이 작은 파문을 만들고 / 네 위로 흐르던 하늘 / 보이지 않는 너의 심연 속으로 / 자꾸자꾸 내리다 보면 / 그대라는 마음 떨구지 못해 / 마음 한구석 화석으로 남아 /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재촉하곤 했지 / 책장을 넘기며 궁금한 널 찾아내려고 / 거울 속 길들여지지 않는 너를 향해 / 한 줄 주름을 그리곤 살아야 했지 / 만날 수 없는 네가 더 소중하고 그리워 / 하늘 먼 길 네게로 가곤 했지 / 호수엔 주름 하나 깊어지고       비가 내리는 호수를 향해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호수는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 보고, 하늘은 둥근 호수를 향해 비를 뿌리고 있구나. 둘 중 누구 하나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구나.“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호수엔 파장이 셀 수도 없이 번져 간다. 파장은 모든 기억과 시간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려 한다. 불가항력의 원칙처럼 끊임없이 밀려지다 보면 호수의 턱에 걸치게 된다. 어느 사이 파장은 다시 호수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빗방울이 떨어진 곳으로부터 동그랗게 번지고 있다.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가장자리에서 다시 중심으로 반복하고 있다. 와중에도 물결 사이 사이로 하늘이 비친다. 그렇게 하늘은 호수로 내려와 앉고, 호수는 하늘이 된다. 서로에게 자신을 비추고 투영해져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내 이마엔 주름이 세줄 그어져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 거울을 보다 발견하게 되었다. 눈가에 잔주름도, 입가에 팔자 주름도, 목에 늘어진 주름도 보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주름은 그날 생긴 게 아닌 것을 알기에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야 했다. 햇빛에 눈을 찡그렸던지, 이마를 누르고 잠을 잤던 습관 때문인지 나도 모른다. 단지 오랜 시간 지나면서 훈장처럼, 상처처럼 만들어진 흔적, 나뭇잎에 단풍이 들듯 세월이 천천히 만들어간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호수의 주름과 거울에 비친 이마의 깊은 주름을 보았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피카소의 고독했던 ‘청색시대’를 떠올렸다. 그의 창작기간 중 가장 외롭고 힘들었던 시기, 청색의 하늘과 푸른 호수의 시간에 나는 푸른 얼굴을 가지고 기타를 치는 한 노인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그 작품명은 ‘늙은 기타 연주자’이다. 마티스에게 빨강이 중요한 색이듯 구스타프 클림트에게는 황금색이, 초창기 피카소는 청색이 중심이었다. 피카소의 청색은 특별하고도 개별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청색은 밤의 색이고 바다의 색이며 하늘의 색이었다. 나는 이것에 호수의 색을 더하고 싶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생명과 열정을 표현하는 따뜻한 색이라면, 파란색은 깊고도 차가우며 허무와 빈곤, 그리고 절망에 직면한 고독의 색이었다. 블루는 캔버스에 칠해진 색을 넘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고독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고독 없이는 어떤 예술도 창조될 수 없다. 나는 나 스스로 고독을 지켜 왔다.”라고 그는 독백했다. 노인의 깊은 주름이 오늘 호수에 주름이 생기는 이유가 된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호수와 하늘이 하나로 투영되듯이 그는 깊고도 우울한 청색의 시간을 이겨내며 호수에 주름이 생겨난 이유를 알아차린 세기의 화가가 아니었을까.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호수 주름 호수 위로 팔자 주름 오늘 호수

202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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